내가 뭘 본 거지......
+ 포인트
+ 위키를 파고 팔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흥미가득 설정들
+ 미래기술인지 판타지인지... 신세계관을 구성하는 상상력
+ 자본을 등에 업은 극장판의 힘, 유려한 작화
- 포인트
- 인간관계를 밥말아 먹은 원초적인 주요 캐릭터들로 인해 보는 사람 마음이 지쳐감
- 대의와 순애로 포장시킨, 결코 미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범죄에 대한 미화
- 굳이 저 구도로? 굳이 저 방식으로? 싶은 섹슈얼한 서비스씬들이 마이너스
오타쿠라면 에반게리온은 알아야지...
국내에서는 에반게리온이라는 이름에는 보기 드믄 브랜드 파워가 있다. 소위 원나블이라 불리던 정말 보편적인 대중문화가 된 작품과 진정 매니악한 서브컬처 오타쿠의 세계, 그 사이 중간에 위치하는 묘한 인지도이다. 한때 주름잡던 아이돌이 아스카가 최애캐릭터라고 예능에서 공공연히 얘기하는 등 노출빈도가 많아, 애니메이션을 즐기지 않는 머글이라도 "아 저거 좋아하면 찐이구나"하고 이름은 들어봤을 유명세이다. 처음엔 그냥 건담시리즈처럼 로봇들 나와서 멋지게 싸우나 싶은 메카물이겠다 싶겠지만, 후기나 평론을 좀만 찾으면 그 철학적인 해석과 감성에 대한 찬미가 가득한 걸작이라는 얘기를 많이 볼 수 있다. 본인도 여기서 기대와 흥미가 시작 되어 고등학교 때부터 저 명작이라는 걸 언젠가 봐야지 오랫동안 다짐해왔다가 십여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건들여 보았다.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오리지널 TVA와, 신극장판 두가지가 있다. 두 버전이 세계관의 큰 줄기는 비슷하나, 등장인물들의 설정이나 소모시키는 방식(보고나니 진짜 '소모'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에서 생각보다 차이가 좀 있는 편이다. 에반게리온 원작 애니는 넷플릭스에 있는 거 같은데, 작화가 너무 옛날이라 차마 건들이지 못하고 나무위키로 보는걸로 대체했다. 신극장판이라도 드디어 마음을 먹고 보려하는데, OTT 4개를 구독중인데 그 중 어디서도 스트리밍 해주지도 않길래 개별 대여해서 봤다. 아마존프라임비디오에서 서비스 중이라고 하는데 독점 계약인건가 싶다.
그렇게 본 감상은...... 서두의 한줄로 축약된다..... "내가 뭘 본 걸까?"... 나이가 들었어도 피폐한 계열의 무게감 있는 콘텐츠는 내 취향이 아니구나 하고,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이 글은 혹시라도 에바를 봐볼까 말까하는 입문 오타쿠분들이 건들일지말지 고민하시는데 도움이 되면 하고 쓴다.
오타쿠들 부여잡는 방대하고 장엄한 스케일
그래도 좋은 이야기로 시작하자면, 창작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관심을 끌만한 세계관 세팅이다. 기독교 대천사들 이름을 붙인 사도들이 외계침공체인 것부터 우선 나무위키를 들어가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리고 당연하다시피 받아들였던 초기 설정들 하나하나가 뒤통수를 얼얼하게 때리는 반전들이 되어 휘몰아친다. TVA버전 결말에서 밝혀지는 AT필드라는 핵심적인 소재의 정체는 특히나도 너무나 마음에 드는 발상이었다. 진짜 거창한데, 거창한 값을 하는 스케일이다.
특히나 신극장판의 경우, 이미 너무나 유명해진 이름값을 기반으로 영화를 리메이크 하니 자본에도 제약이 없었는지, 아낌없는 작화들과, 현란한 효과, 상상력 스케일들을 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는 아쉬움이 없었던 것 같다. 구작 TVA는 저예산으로 제작되었기에 제작비를 아끼면서 내용을 전개시키는 연출력이 돋보이면서 안노 히데아키를 연출의 거장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신극장판은 그 쪼들렸던 서러움을 다 털어낸 것만 같다.
정신력 소모戰
콘텐츠가 예술 평론적으로도 명작 소리를 듣는다면, 작품이 결코 가벼운 감정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은 합리적 의심이 갈 것이다. 에바 역시 그럼 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아야 하는 작품이다. 어느 정도 각오 반 기대 반으로 임하였지만, 필자는 결국 범인에 불과하였는지..... 이를 '미'로 받아들이는 것에 실패하였다. 전체적으로 처음보는 사람입장에서 작품에 대한 호불호 결정 요인 두개가 1) 주인공 부자에 대한 불호와 2)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줄거리 및 분위기 전반에 대한 불호일 것 같다.
우선, 이카리 신지 찌질해서 못봐주겠다. 물론 이카리의 죄가 아니고, 그는 어디까지나 이보다 더 처참할 수 없는 가정 환경의 피해자다. 가정환경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 본인이 원치 않은 왕관과 책임, 잔혹하고 인륜이 없는 진실들 등 모든 것이 참작 요인이지만, 본인의 노력대비 주변인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못마땅해보이는 지점이 잦으면서 신지에게 영 정이 붙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은 그 사람에대한 이해요인은 되겠지만, 타인에 대한 해악을 용인하는 면죄부가 될 순 없는 거다.... 스크린을 가득채우고 볼 주인공의 행보라고 보기엔, 그에게 피해입는 주변인들에게 감정이입이 크게 되어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냥 저쯤되면 제발 더이상 저 주인공에게 기대하고 의지하지 말고, 그냥 쟤를 포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던지, 그냥 망하고 말자라는 마음의 소리만 속으로 부글부글 소리치곤 했다.(글로 쓰자니 너무 T같네... 나 F인데)
다른 주요 인물들도 진지하게 보고있으면 덩달아 정신병 걸릴 것 같아 못봐주겠다. 이카리 겐도부터 2000년대 들어와서 지향하는 부모상과는 매우 괴리가 크기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대의를 명분으로 한 무책임한 가정파괴를 막판에 와서 아내에 대한 사랑 등으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데, 이게 가장 최악이다. 슬프지만 이 이야기에 대한 수요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이는 맨박스에 절여진 남성상과 가부장제도 속에서 자라 가스라이팅 당한 세대들에게는 일면 낭만을 가져오는 이야기이다. 사나이 감성과 '대의'로 무장된 아버지상 아래에서 자란 수많은 이들 중 누군가는 겪어보았을 결핍된 부성애를 갈망하는 이야기로, 그 아래에서 자란 억하심정이 묘사되면서도, 그러면서 동시에 이 아버지상을 정당화시켜서 낭만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감성이 엿보인다. 이해는 하더라도, 이건 분명 오늘날에는 사장될 정당화되어서는 안될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오은영 박사님이 이카리 겐도를 보면 뭐라고 할지 상상해보자....
최애잡이도 실패...
사실 이 작품의 팬들이 주인공 부자에 메인으로 정을 두고 좋아서 보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작중 캐릭터 인기도 아야나미 레이나 아스카가 압도적으로 메인인 걸 보아도 그렇다. 사실 두 여주인공은 작품외적인 인기에 비해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작품 내에서 스토리라인상 둘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도 않아서 놀라기도 하였다. 사실, 매번 중도하차하는 코드기어스를 볼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는데, 너무 큰 세계를 잡고 상상력을 그려내는 이런 세계관물에서는 캐릭터 간 관계성의 디테일에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시간 할애와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신극장판이기에 TVA 원작보다도 더 부족하다 한다... 아무튼 여주인공들도 빠져들만한 매력이 있지는 않았다.
사실 진짜 기대하고 했던 건 나기사 카오루였는데... 물론 이마저도 2차 창작에서의 존재감을 생각하다가 막상 영화를 보니 조금 실망스럽긴 했다. 그럴거라는 걸 모르고 본 것도 아닌데도 허무한건 허무한거다.... 신극장판이라고 그래도 여기에 환장하는 팬들을 위한 서비스 씬은 많이 퍼부어주나(구작 TVA보다는), 진중히 공감되는 치밀한 감정설계나 개연성을 느낄만하지 못하고 역시나 부족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감정 개연성이 없이 일방적이고 맹목적이라는 면에서, 카오루가 신지를 보는 게 차라리 부모 마음에 가깝게 보이고, 되려 겐조랑 대척점에 둔 자애로운 아버지상?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기사 카오루에 대한 환상은 본작보다도 나무위키가 더 열심히 영업해주는 듯하다....ㅎㅎ)
그래서 에바 시리즈의 인기 이유는 뭘까?
결론적으로, 신극장판에서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대한 인기와 칭송만큼의 감동을 받지는 못하였다. 여느 소년만화와 같은 대가리 꽃밭 세상이 아닌 결핍된 인간군상과 디스토피아를 그려낸 점에서 가치가 있고, 거기에서 예술성이 나온다고 생각하나, 나에게는 이 시리즈의 예술성과 감상이 작품 전반적인 불쾌감을 이겨낼만한 매력이 되진 못하였던 것 같다. 우울증도 겪을만큼 겪으면서 감정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차마 공감하지 못하고, 또 하고싶지도 않은 이야기가 많다. 결국 진성 오타쿠화 되지 못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또, 사건들의 결과물들만 보면서 전체적인 진행방향을 따라가기에는 큰 무리가 없으나, 그 사건들을 논리적으로 이해해내기까지는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다. (특히 Q 이후로...) 각각 임팩트 발생 로직이나, 주요 인물의 타임루프 등 세계관 자체가 복잡한데다가, 은유적인 짧은 대사로 처리해버리는 통에 한번 보는 것만으로는 다 이해하기 어렵고 불친절한 편이다. 이처럼 예술성을 챙기면서, 작품이 어렵고 불친절하다면 양적인 시청자 확보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게 일반적이라는 점인데, 그런데도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메카물의 대명사와도 같은 저명도를 지니는 큰 인기를 구가한 게 의외이긴 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파고파는 노력들이 필요한 게 덕후층을 더 붙잡는다는 시각도 있지만, 그건 분명 소수 중의 소수이다. 애니메이션 장르 역시 영화와 다를 바 없이 평론가들이 예술적으로 명작들이라 꼽는 작품들은 따로 있고, 이들은 서브컬처 내에서도 흥행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결국 인기의 요인은 작품의 하렘물적인 요소에서 찾아야 하나 싶다. 상대적으로 노력이 묘사되지 않는 남자 주인공에게 쏟아지는 여러 이성들의 무조건적인 애정공세...가 바로 하렘물 아닌가... 여기 두 여주인공들은 한 명은 극도로 절제되고 수동적인데 반해, 한 명은 극적으로 진취적이고 활발하여 판이한 성격이 대조되고. 외모도 상이한 포인트로 대비되어 각기 다른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듯하다. 더불어 모성애에 가까운 미사토와 동정심인지 뭔지 모를 조연들의 호의까지, 신지는 어찌보면 참 사랑받는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그 호의를 되갚거나 걸맞는 성숙함을 보여주지 못하는게 개인적으로는 영 정이 안갔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더 작품의 매력이었지 않을까. 아무튼 작품 전체적으로 정말 굳이? 싶은 여캐 서비스씬들이 많아 보기 민망하고, 더러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결,
○ 명작이니 봐봐야겠다고 싶으셨다면, 다시 한번 취향 고민해보시길 바란다.
○ 작품성은 구작 "TVA + 엔드오브에반게리온"에만 있다고 한다.(대부분 팬들 曰)
○ 카오루 명성에 비해 비중과 작붕까지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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