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아이돌의 첫 등장부터 기산한다면 케이팝 아이돌 문화의 역사는 어느덧 30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는 팬이라는 소비층과 아티스트라는 공급자 사이 많은 암묵적인 약속들이 생기고 자리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충분치 않았다. 2010년대 음악차트를 장악했던 유수한 히트곡들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서 아이돌 팬덤 문화는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채로 줄곧 사회의 눈총을 받는 비주류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BTS신드롬 이후로, 이제는 도대체 무엇이 케이팝의 성공요인인지를 찾고자 케이팝의 특성을 정의하고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와 연구들, 그리고 소비자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아이돌이 만들어내는 결과물 혹은 아이돌이라는 상품 스스로가 품고 있는 특성들로 구분되는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대표적인 관습들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유형화된 아이돌 산업의 생산물
1.1. 음악의 시각화와 분업화
케이팝 아이돌 음악산업은 복합감각적인 종합문화예술이다. 초창기에는 청각의 즐거움 추구가 본질인 음악시장에서 다른 음악과의 차별화 요소로서 가미되기 시작한 안무 퍼포먼스라는 시각적인 콘텐츠가, 이제는 명실상부한 케이팝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았다. 해외 케이팝 수용인들은 노래와 춤이 함께하는 퍼포먼스가 케이팝의 가장 큰 특징요소로 뽑고 있고,[1] 이러한 시청각적인 공연 예술화(化)는 트랜스 미디어 전략[2]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비단 ‘퍼포먼스 무대’ 뿐만 아니라, 포토북 형태가 표준이 되어버린 음악 앨범, 스토리라인보다는 시각적 미학에 집중하는 뮤직비디오까지, 아이돌의 음악활동은 귀를 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눈도 함께 치켜 떠서 집중해야 할 시각적인 상품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챙겨야 할 요소가 많아진 이 문화상품의 생산라인은 철저한 분업화와 탄탄한 아웃소싱 시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전문 작곡가, 전문 작사가, 전문 편곡자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음원을 듣고, 전문 안무가들의 공모안들을 조합하여 완성되는 퍼포먼스 안무를 본다. 이러한 분업을 기반으로, 케이팝 아이돌 가수는 작곡·작사 같은 창작 능력에 대한 기대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무대 위에서 펼치는 퍼포머의 역량을 주로 기대받는다. 이러한 기대치에서 벗어나 멤버들의 비주얼 이외의 것을 강조하는 뮤직비디오나 멤버의 자작곡 발표 같은 이색적인 시도가 있을 때면, “아이돌 같지 않다.” “탈아이돌급이다.”와 같은 반응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 아이돌 산업의 생산물들이 장르화 되어있어 특정한 형태를 띄기를 기대받고 있음을 반증한다.
1.2. 아이돌 활동 형식화
비단 창작물들 뿐만 아니라, ‘컴백 활동’이라는 말로 축약되는 아이돌의 활동 역시 정례적인 양상을 띄고 진행된다. 아이돌 컴백활동의 기준점은 ‘음원 발매’이며, 그 주기는 최소한 1년에 한 번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게 팬들의 일반적인 기대치이다. 통상적으로 유명 팝가수들이 ‘앨범 발매’를 기준으로 활동하며 2년 정도의 간격을 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케이팝은 빠른 순환율을 보인다는 특징을 가진다. 앞서 언급한 생산 분업화와 ‘미니앨범’ 혹은 ‘싱글앨범’의 보편적인 활용이 이러한 컴백주기의 축약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컴백활동’은, 활동여건에 따라 일부 가감은 있으나, 정형화된 수순을 따르는 한정된 유형의 활동들로 구성된다. 우선 음원 발매 이전에는 팬들의 기대를 자극시키는 티저 이미지 및 비디오의 공개와 예능 방송들의 녹화 스케줄이 주를 이룬다. 음원 발매 직전·후로는 라이브 방송프로그램 출현이 개시되어 온/오프라인 컴백쇼와 라디오 방송, 그리고 활동의 백미가 되는 음악방송 출현 활동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앨범 프로모션 일환으로 팬미팅, 팬싸인회 같은 행사들이 개최되곤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컴백활동 구성요소들의 본질은 음원과 앨범 판매 촉진을 위한 ‘프로모션’이다. 그러나 아티스트와의 접점 확대를 열망하는 팬덤 소비층의 욕구 특성은 음원판매와 프로모션 활동 사이 목적-수단 관계를 역전시켜 ‘팬사인회를 가기 위해 앨범을 다량으로 구매’하는 현상까지 만들어냈다. 팬들은 예측하는 컴백활동 양상이 존재하기에 이에 벗어나는 행보에는 반발한다. 대표적으로는 글로벌로 수요층이 확대된 BTS가 해외 프로모션을 위해 이러한 국내 활동의 양식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국내 팬들에게서 부정적인 반응들이 크게 이어졌던 사례가 있다
음원 발매 일정과 연계성이 적은 비정기적인 활동들 역시 한정된 활동 선택지 내에서 벗어남이 드물다. 음악인으로서 정점인 콘서트와 각종 행사공연들이 대표적이며, 이외에 연기/예능/솔로앨범 활동으로 유형화 가능한 멤버 개인 역량 기반의 개인활동들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활동들 역시 활동무대의 글로벌화와 규모적인 확장을 제외하면 십년 전과 현재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트렌드에 민감한 산업 특성상, 새로운 서비스가 출현하여도 업계 내 전파가 빠르게 이루어기에 1~2년 안에 보편적인 서비스로 자리잡는다. 2020년대에 들어 새로 등장한 팝업스토어나, SM엔터테인먼트의 ‘버블’과 하이브의 ‘위버스’로 대표되는 팬플랫폼과 소통서비스를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장르화되어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는 아이돌들의 활동 방식은 케이팝 아이돌 산업의 안정성을 높이면서 시장성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소비자인 팬층은 과거 아이돌들의 사례를 보면서 다음활동에 대한 기대감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아이돌의 포맷화된 활동 양상은 새로운 활동에 대한 기대감과 기대 충족 시의 만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공급자인 아이돌 기획사들 역시 이렇게 일정하게 정해진 활동방식이 있기에 어느 정도의 수요예측과 시장공급 스케줄링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케이팝 아이돌 시장은 그간 축적되어온 관습들을 기반으로, 소비자의 효용가치는 더욱 높이면서 분석과 전략 형성이 가능한 체계적인 시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2. 아이돌 상품 자체의 장르적 특성
2.1. 케이팝 아이돌의 ‘그룹’ 특성
‘케이팝’과 ‘아이돌’ 두 단어의 어원 어디에도 그룹, 단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진 않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많은 아이돌 그룹의 비중을 보이며, 현재 동아시아를 떠나 세계적인 성공을 보이는 건 아이돌 그룹들 뿐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으로 기대받는 케이팝의 주된 특성이 그룹활동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국내에선 아이돌 그룹들과 동일한 수요층을 지녔다고 할 만한 보아, 아이유와 같은 솔로가수 주역들이 ‘케이팝’이라는 소속감을 들고서 범국가적인 진출과 성과를 보인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그룹활동은 경력이나 인증 같은 형태로 남아, 똑같은 댄스가수 활동을 하더라도 솔로가수와는 다르게 그룹활동을 한 적 있는 이들만 주로 아이돌 음악 범주 내로 수용되곤 한다.
아이돌 상품이 그룹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생기는 이점을 보면, 그룹이 장르 특성으로 굳어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이점은 같은 브랜드 네임아래 다양한 취향 요소들을 패키징함으로써 얻는 번들링 효과이다. 외모, 성격, 음색, 재능 등 다양한 개인의 특성이 ‘그룹’의 특성으로 합쳐져 인지되는 것은, 시장 관점으로 볼 때 공급자의 공급능력과 소비자의 선호가 합치될 확률을 크게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멤버들 특성이 다양할수록 각자 연기, 예능, 뮤지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이 가능해지기에, 아이돌 상품을 기획 시에는 이런 마케팅 효과도 고려하는 전략이 주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로 음악적인 효과들이 있다. 오랜 옛날부터 합창과 합주와 같은 음악유형을 발전시켜 왔다시피, 다양하게 여러 음색이 조화되는 음악을 선호하는 취향이 존재하고, 아이돌 음악은 이런 취향을 저격한다. 그리고 보컬, 래퍼, 댄서로 분화 되는 포지션은 ‘역할분담과 조화’라는 기본적인 선호 요소를 만들고, 각자의 영역에서 분업에 따른 효율과 전문성 향상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러한 음악적인 분업은 케이팝 음악이 힙합부터 발라드까지 범장르적으로 음악들을 포괄하는 확장성을 갖게 된 기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관계성’이라는 특수한 시너지 효과이다. 단체활동으로 인한 부산물로 간과될 법한 이 특성은 케이팝 아이돌 산업 내에선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하나의 그룹으로 묶여서 맺는 유대관계와 이에 대한 의미부여는 아이돌 팬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비롯한 가장 극적인 감정을 느끼는 계기를 제공하곤 한다. 때문에 그룹의 해체, 멤버 탈퇴 등의 이슈들은 언제나 연예계 뉴스 일면을 장식하는 민감하고 관심 높은 사안으로 다루어져 왔다. 또한 멤버 둘, 셋 간의 다양한 조합의 관계성은 팬픽으로 대표되는 팬덤 내에서 재생산은 물론, 더 나아가 출현 방송 콘텐츠에서도 끊임없이 소재를 공급하는 화수분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아이돌 그룹을 소개 시 대표적으로 활용되는 위키계열 사이트에서 ‘멤버 간 케미’ 항목에 글 전체의 30%까지도 할애된 광경을 보면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2.2. 케이팝 아이돌 ‘멤버’의 특성
‘장르’의 개념을 문화상품의 생산과 소비에 작용하는 일종의 관습체계[3]라고 이해한다면, 아이돌의 삶을 사는 개인들이 사회적으로 요구받으며, 이에 부합되기 위해 노력하는 공통적인 재능과 태도 역시 하나의 장르 요소라 볼 것이다. ‘인성논란’이란 키워드가 범죄와 같이 회자되는 한국의 문화는 연예인과 같은 공인들에게 겸손, 사회순응과 같은 유교가치관 기반의 애티튜드를 요구한다. 케이팝 아이돌 산업 역시 예외는 아니기에 해외 외신에서도 정치적 발언을 극도로 아끼는 케이팝 스타들의 특성을 주목하여 보도한바 있다.[4] 아이돌의 경우 이에 더해서 업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자기희생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데, 위와 같은 성향들이 케이팝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시각[5]도 있어왔다. 이외에도 공개연애의 금지와 긍정적인 태도 유지, 표정관리 등 감정노동적인 요구들도 아이돌 멤버 개개인이라는 상품을 빚어내는 정형화된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케이팝’이 단순한 음악장르가 아니라 제작방식 체계 등을 포함하여 정의된다는 점에서, 이 한국 특유의 사회문화에서 기인하는 인성에 대한 속박적인 요구와 그 결과물인 아이돌 멤버들 개개인 역시 간과되어선 안될 장르의 주요 특성 중 하나로 봐야할 것이다.
[1] 이형은(2017). ‘글로벌 장르로서의 한류 – K-Drama와 K-pop의 글로벌 장르화 가능성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 홍석경(2014). ‘세계화와 디지털 문화시대의 한류’. 한울 아카데미
[3] 정준영 외 5명(2023). ‘문화산업과 문화기획’.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4] ‘Donald Trump re-election team denies TikTok teens behind low rally turnout’. BBC. 2020.06.22.
[5] 김수정•김수아(2015). ‘집단주의적 도덕주의’ 에토스. 언론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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